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프랑코 (문단 편집) === 섭정 통치 === || [[파일:1200px-Francisco_Franco_en_1964.jpg|width=300]] || || 1964년 || || [[파일:external/cdn.dipity.com/633e0e63b9b6542cb6d5772d7afe78be_1M.jpg]] || || 1975년 1월 || 프랑코는 집권 이후 자신을 스페인 왕국의 섭정임을 자처하며 왕정을 복고하고 귀족 제도를 부활하는 등 왕국을 다시 열긴 했지만 정작 자기 살아 생전엔 왕을 세우지 않았다. 프랑코는 1961년 과거 스페인을 지배한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에게 스페인의 국왕 자리를 제안하였다. 하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거부한다. 하지만 프랑코가 오토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제안한 것 자체는 진지한 제안이 아니라 자신에게 개기는 [[알폰소 13세]]의 3남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을 자극하려는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스페인 내전 시절부터 복벽을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해온 후안 백작은 처음에 프랑코를 지지했으나 스페인 입국 과정에서 프랑스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은 후 히틀러에게 로비하면서 프랑코 축출을 요청했고, 연합국이 승리한 후에는 자유주의자로 돌변하여 미국과 영국에 복벽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프랑코와도 협상의 길을 열기 위해 볼모로서 아들 후안 카를로스를 스페인으로 보낸다. 후안 카를로스는 아버지와 달리 프랑코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살아 생전 프랑코는 스페인에서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었기에, 후안 카를로스는 [[펠리페 6세]]가 태어났을때 프랑코에게 제일 먼저 찾아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읍소할 정도로 설설 기었다. 이에 프랑코가 펠리페와 페르난도 중에 고민하다가 페르난도는 얼마 전에 있었으니 보르본 왕조의 초대 왕인 펠리페가 좋겠다고 펠리페로 지어준다. 또한 프랑코는 카를리스타라던가 보르본 왕조의 다른 유력 왕족들을 카드로 저울질하면서 계속 후안 카를로스를 조련했고 1967년에 자신과 인척관계(처남)인 [[콘스탄티노스 2세]]가 [[그리스 군사정권|장군들의 쿠데타]]로 망명가는 꼴을 보게 된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게 더욱 납작 엎드렸다.] 그런 후안 카를로스에게 대만족한 프랑코는 자신에게 복종할 생각이 없는 후안 백작 대신에 후안 카를로스를 새 국왕으로 결정하고 1969년 그를 행정법을 통해 '스페인의 왕', 동시에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한다. 프랑코와의 협상 카드로 스페인에 간 아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걸 알게 된 후안 백작은 길길이 날뛰며 아들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했지만 이후 후안 카를로스 1세 치하에서 스페인이 민주화되면서 왕위계승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프랑코는 외동딸 카르멘만 있었고 아들이 없어서 권력을 세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프랑코 정권 말기에 이르면 서방과의 관계가 계속 긴밀해지면서 이전처럼 나라 문을 닫고 살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에 아마 아들이 있었다고 해도 북한의 김씨 일가나 시리아 아사드 일가처럼 권력 세습은 안 했을 공산도 있다. 원래 후안 카를로스는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실제 프랑코가 후계자로 삼았던 것은 스페인 내전 이후 함께 해 온 그의 측근이었던 해군[[원수(계급)|원수]]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Luis Carrero Blanco) [[제독]]이었다. 프랑코는 그를 1973년 수상에 임명하며 후계자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스페인 군부는 후안 카를로스를 애송이(ese niño)라고 공공연하게 비웃었다. 그런데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블랑코 제독이 암살당하면서[* 차에 탄채로 폭탄이 터져서 폭사한다. 이때 폭발 충격으로 차가 공중으로 이십미터 가량이나 솟아오르는데 그게 짤방으로 남아 지금까지도 스페인 인터넷에서 '스페인 최초의 우주비행사'[[https://images.app.goo.gl/3iSY4HsQ6Xzv1qkS9|#]]라며 [[조리돌림]]당한다.] 프랑코 체제는 후계자를 잃었고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파일:external/elpais.com/1386951906_963822_1386952523_sumario_grande.jpg|width=480]] 프랑코 총통과 한 때 후계자였던 블랑코 제독 [[파일:radiofeature2035-b7a0e.jpg]] 1969년, 훗날 스페인의 국왕이 되는 후안 카를로스와 악수하는 프랑코. 두 사람의 관계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꽤 괜찮은 편이였다고 한다. 결국 프랑코는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 했던 후안 카를로스를 프랑코 체제의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군부도 후안 카를로스에게 2대 [[카우디요]]가 되길 바랬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어릴 때부터 그를 신경써서 교육했다고 하는데, 교육 내용이 실질적으로 죄다 군사교육. 후안 카를로스는 육해공군 사관학교 세 곳을 모두 졸업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프랑코는 장래의 임금님에게 스페인 전군의 장교단에 골고루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맥을 만들어 준 것. 이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왕위에 오른 뒤 군의 움직임에 민활하게 대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에게 정치를 가르쳐주진 않았는데,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프랑코에게 내각 회의에 참여시켜달라고 하자 "'''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방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한 바 있다.[* 출처: 전 주 스페인 미국 대사 David Brightly와 John Holroyd-Doveton의 대화.] 이 에피소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자신이 직접 들은 얘기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과 떨어져 자란 국왕 본인은 프랑코에게서 일종의 부성애를, 아들 없이 산 프랑코 본인은 국왕을 일종의 아들처럼 아끼며 자랐다고 한다. 후안 카를로스는 공적인 자리에서 프랑코 옹호 발언을 하지는 않았으나 사석에서 다른 사람이 프랑코를 비판하는 건 용납 안할 정도로 프랑코에 대한 친밀감이 컸다고 한다. 한편 사형과 수감을 비롯한 탄압은 말년이라고 특별히 더 누그러지고 그딴 거 없었기에 후안 카를로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코를 두둔하는듯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프랑코 살아 생전인 1970년대부터 프랑코 정권에 대한 저항이 멈추지 않았고 프랑코의 사망이 목전에 다가오자 저항 운동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프랑코 체제는 생존을 위해 '통제된 민주주의'란 명목으로 민주주의와 일부 협상을 시도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개혁 요구에 놀란 아리아스 나바로 수상은 바스크 분리주의자, 카탈루냐 분리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처형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프랑코 말엽의 스페인은 다시 유럽 정가의 천민으로 추락했다. 프랑코는 군부에게 후안 카를로스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주문하는 등[* 나에게 바친 충성을 국왕에 바치라는 것이 군부에 대한 프랑코의 유언이었다.] 후안 카를로스의 권위를 세워주는 행보를 밟았지만 민주화 세력과의 일부 협상 시도를 제외하곤 큰 틀에선 자신의 카우디요 독재 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프랑코를 절대적으로 떠받들었던 벙커파들도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독재를 원했고, 체제 내부에서도 개방파나 기술 관료 세력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후일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급격한 개혁 수준까진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